고혈압이 있는 당신, 1년 뒤 갑자기 기운이 없어지고 잘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까요?
"요즘 유독 기운이 없고, 예전만큼 잘 걷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나 주변 어르신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의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노쇠(frailty)'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지"라고 넘기기 쉽지만, 최근 칠레에서 진행된 한 연구는 이 노쇠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원인들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고혈압입니다.
혈압이 높다는 것이 단순히 심장이나 혈관 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1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몸 전체가 약해지는 '노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신호 중 하나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노쇠해지는 걸까요?
그리고 고혈압은 왜 여기에 끼어드는 걸까요?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시면 그 이유부터, 지금 나 자신이나 부모님께 적용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짚어드리겠습니다.
이 연구는 칠레 산티아고와 콘셉시온 지역에 사는 60~80세 어르신 394명을 대상으로, 2021년(1차 조사)과 2022년(12개월 후 2차 조사) 두 시점에서 건강 상태를 추적한 전향적 코호트 연구입니다.
'전향적 코호트 연구'란 지금 시점에서 사람들을 모아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연구 방식으로, 이미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는 것보다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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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frailty)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먼저 '노쇠'라는 말 자체를 정확히 짚어봐야 합니다.
이 연구에서는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FRIED 척도라는 도구로 노쇠 여부를 판단했습니다.
FRIED 척도는 다음 5가지 항목을 확인합니다.
- 의도치 않은 체중 감소
- 근력 약화(예: 손으로 무언가를 꽉 쥐는 힘이 떨어짐)
- 걷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짐
- 쉽게 피로감을 느낌
- 신체 활동량이 눈에 띄게 줄어듦
이 5가지 중 해당하는 항목이 하나도 없으면 '건강(robust)' 상태, 1~2개에 해당하면 몸이 약해지기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전노쇠(pre-frail)', 3개 이상에 해당하면 '노쇠(frail)' 상태로 분류합니다.
즉 노쇠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태에서 전노쇠를 거쳐 서서히 진행되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번 연구에서는 조사를 시작한 시점(2021년)에 이미 전체 참가자의 22.7%가 이 '노쇠' 단계에 해당했습니다.
열 명 중 두 명 이상이라는 뜻이니,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노쇠한 어르신들은 어떤 특징을 보였을까요?
그럼 노쇠 단계에 있던 분들은 건강하거나 전노쇠 단계에 있던 분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점이 달랐을까요?
연구팀은 여러 항목을 비교했고,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p<0.05로 표시되는데, 이는 "이 차이가 우연히 생겼을 가능성이 5% 미만"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해 우연이 아니라 실제로 관련이 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있다는 신호입니다)를 여러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노쇠한 어르신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았습니다.
- 사회 활동(모임, 커뮤니티 참여 등)에 참여하는 정도가 낮았습니다.
- 우울 증상(PHQ-9라는 우울감 체크 설문으로 측정)과 불안 증상(GAI라는 노인 불안 설문으로 측정)이 더 높았습니다.
- 외로움을 느끼는 정도(ULS-3라는 외로움 측정 설문 점수)가 더 높았습니다.
- 인지 기능(MoCA라는 기억력·집중력·판단력 등을 확인하는 간단한 검사) 점수가 더 낮았습니다.
- 여러 질병을 동시에 앓고 있는 다중질환(multimorbidity, 예를 들어 고혈압과 당뇨, 관절염을 함께 앓는 경우처럼 두 가지 이상의 만성질환이 겹치는 상태)의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이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 노쇠는 단순히 "다리 힘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몸속 여러 질환이 한꺼번에 얽혀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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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무엇이 노쇠를 만들었을까? 8가지 예측 요인
여기까지는 '이미 노쇠한 사람들이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는가'를 본 것입니다.
하지만 더 궁금한 것은 "건강하거나 전노쇠 상태였던 사람이 1년 뒤에 실제로 노쇠 상태로 넘어가는지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입니다.
이를 위해 연구팀은 로지스틱 회귀분석이라는 통계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여러 명의 용의자(후보 원인들) 중에서 실제로 사건(여기서는 미래의 노쇠)과 확실히 관련 있는 인물만 걸러내는 수사 과정과 비슷한 통계 방법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 결과, 1년 뒤 새롭게 노쇠 상태가 된 것을 예측하는 데 의미 있게 작용한 요인은 다음 8가지로 나타났습니다.
- 나이
- 인지 기능(MoCA 점수)
- 지각된 사회적 지지(MSPSS, 즉 주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도움과 정서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지)
- 우울 증상
- 불안 증상
- 고혈압 유무
- 혈관질환 유무
- 체질량지수(BMI)
이 8가지 요인을 모두 고려한 통계 모델은 전체적으로 통계적 유의성(p=0.040, 즉 이 조합의 예측력이 우연히 나온 결과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수준)을 보였고, 노쇠가 왜 생기는지에 대한 전체 이유 중 약 28%를 이 모델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28%라는 숫자를 오해하지 않으셔야 하는데, 이는 "이 8가지 요인만으로 노쇠의 원인을 4분의 1 정도는 짚어낼 수 있지만, 나머지 72%는 아직 이 연구에서 다루지 않은 다른 요인들(유전, 생활습관, 다른 질환 등)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즉 완벽한 예측 공식은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설명력을 가진 결과라는 의미입니다.
왜 고혈압이 노쇠와 인지기능까지 흔드는 걸까?
여기서 눈에 띄는 지점은 고혈압과 혈관질환이 인지 기능, 우울, 불안과 함께 같은 목록에 올라와 있다는 점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다른 연구들을 살펴보면 이 연결고리가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한 체계적 문헌고찰(여러 개별 연구들을 한꺼번에 모아 공통된 결론을 찾는 연구 방법으로, 사후 부검 자료를 분석한 15개 연구, 총 5,879명의 자료를 종합했습니다)에서는 고혈압이 있는 사람의 뇌에서 알츠하이머병과 관련된 병리적 변화(뇌 속 단백질 찌꺼기가 쌓이는 정도 등)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즉 고혈압은 단순히 심장에 부담을 주는 것을 넘어, 뇌혈관에도 지속적인 부담을 주어 인지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칠레 연구에서 고혈압과 인지 기능이 나란히 노쇠의 예측 요인으로 함께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또한 고혈압 중에서도 약을 세 가지 이상 써도 혈압이 잘 조절되지 않는 '저항성 고혈압' 환자들을 조사한 다른 연구에서는, 이런 분들이 대체로 고혈압을 앓은 기간이 더 길고, 비만이나 당뇨, 신장 기능 저하 같은 문제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고혈압이 혼자 다니는 병이 아니라, 여러 만성질환과 몸의 전반적인 상태와 얽혀서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며, 이번 연구에서 나타난 "다중질환이 많을수록 노쇠 비율이 높다"는 결과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정리하면, 고혈압은 그 자체로 혈관 건강의 문제를 일으키고, 이것이 뇌혈관 건강과 인지 기능에 영향을 주고, 인지 기능이 떨어지면 활동량이 줄어들고, 활동량이 줄면 근력과 체력이 약해지면서 노쇠로 이어지기 쉬운 흐름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이 100% 정해진 순서로 일어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개인마다 그 정도와 속도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지금부터 무엇을 챙겨야 할까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혈압이 있는 당신, 1년 뒤 갑자기 기운이 없어지고 잘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까요?"
이번 연구의 결과를 종합해보면, 고혈압 하나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혈압에 인지 기능 저하, 우울·불안 증상, 낮은 사회적 지지, 다중질환 같은 요인들이 함께 겹쳐 있다면 노쇠로 이어질 위험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연구가 보여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연구가 특히 강조하는 지점은, 노쇠를 단순히 "몸이 약해지는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의 건강과 사회적 관계까지 포함하는 다차원적인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실천해볼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혈압을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관리 목표를 의료진과 함께 설정해보세요.
- 가벼운 걷기나 근력 운동을 꾸준히 이어가면 근력 저하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모임, 종교활동, 지역 커뮤니티 참여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는 활동을 의식적으로 유지해보세요. 사회적 지지와 사회 참여는 이번 연구에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기분이 가라앉거나 불안감이 지속된다면 이를 그냥 넘기지 말고 가까운 사람이나 전문가에게 이야기해보시길 권합니다.
- 여러 만성질환을 함께 앓고 있다면 각각의 병을 따로따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관점에서 정기검진을 챙기시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소개한 내용은 하나의 연구 결과이며, 개인의 건강 상태를 판단하거나 치료 방향을 정하는 것은 반드시 의사, 한의사 등 전문의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 본 글은 PubMed(PMID: 42809783) 논문을 근거로 작성되었으며, 의학적 진단을 대체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