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드시는 혈압약, 어떤 종류인지 알고 계신가요?
고혈압약을 오래 드시는 분들 중에 "이 약이 혈압만 낮춰주는 게 아니라 다른 효과도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신 적 있으실 겁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걱정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치매입니다.
그런데 최근 한 대규모 연구에서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똑같이 혈압을 잘 조절하더라도, 어떤 계열의 혈압약을 먹느냐에 따라 치매 위험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1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추적한 이 연구가 실제로 어떤 수치를 보여줬는지, 그리고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지부터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지까지 차근차근 짚어드리겠습니다.
왜 혈압약 종류에 따라 뇌 건강이 달라질 수 있을까?
먼저 이 연구에서 비교한 두 가지 약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 레닌-안지오텐신계 억제제(RASI): 우리 몸에는 혈압을 조절하는 호르몬 시스템이 하나 있는데, 이를 '레닌-안지오텐신계(RAS)'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혈관을 좁히고 나트륨을 붙잡아 두어 혈압을 올리는 몸속 조절 장치입니다. RASI는 이 시스템의 작동을 억제해서 혈압을 낮추는 약으로, 흔히 'ACE 억제제(ACEI)'와 'ARB(안지오텐신 수용체 차단제)'라는 두 하위 종류로 나뉩니다.
- 칼슘채널차단제(CCB): 혈관 근육 세포로 칼슘이 들어가는 통로를 막아서 혈관을 이완시키고 혈압을 낮추는 약입니다.
두 약 모두 혈압을 낮추는 효과는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레닌-안지오텐신계라는 시스템이 우리 몸속 혈관뿐 아니라 뇌 안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뇌 안의 이 시스템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뇌 혈류를 방해하거나, 뇌에 염증 반응을 일으키거나, 알츠하이머병과 관련된 단백질(베타 아밀로이드)이 뇌에 쌓이는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즉 RASI는 혈압을 낮추는 것과는 별개로, 뇌 안의 이 시스템까지 함께 조절함으로써 추가적인 보호 효과를 낼 가능성이 제기되어 온 것입니다.
이번 연구는 바로 이 가설을, 실제 대규모 환자 데이터를 통해 확인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16만 명의 데이터가 보여준 실제 수치
이 연구는 이전에 혈압약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성인들 중, 새로 RASI를 처방받기 시작한 사람과 새로 CCB를 처방받기 시작한 사람을 비교했습니다.
이렇게 '처음 약을 시작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비교하는 방식을 연구자들은 '신규 사용자 비교 연구'라고 부르는데, 이미 오래 약을 먹어온 사람들을 비교할 때 생길 수 있는 왜곡을 줄여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전국 28개 병원에서 총 16만 4,918명의 자료를 확보한 뒤, 연구팀은 두 그룹의 나이·성별·기저질환 등 조건을 최대한 비슷하게 맞추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를 '성향점수매칭'이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해 쌍둥이처럼 조건이 비슷한 사람끼리 RASI 그룹과 CCB 그룹에서 한 명씩 짝을 지어주는 통계적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순수하게 '약의 종류' 차이만으로 인한 결과 차이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각각 5만 4,042명씩, 총 10만 8,084명이 최종 분석에 포함되었습니다.
평균 약 1년 5개월(516일)을 추적 관찰한 결과, 전체 344건의 치매가 새로 발생했습니다.
이때 나온 핵심 수치가 아래와 같습니다.
- 1,000명이 1년간 관찰되었을 때 새로 치매가 발생한 사람 수(이를 '발생률'이라고 합니다)는 RASI 그룹이 1.26명, CCB 그룹이 1.89명이었습니다.
- 통계적으로 두 그룹의 위험도를 비교한 값인 '위험비(HR)'는 0.68이었습니다. 위험비란 기준이 되는 그룹(여기서는 CCB)의 위험을 1로 놓았을 때 비교 그룹의 위험이 얼마인지를 나타내는 숫자로, 0.68이라는 것은 RASI 그룹의 치매 위험이 CCB 그룹보다 약 32% 낮았다는 뜻입니다.
- 이 결과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95% 신뢰구간'은 0.55~0.84였습니다. 신뢰구간이란 실제 값이 이 범위 안에 있을 가능성이 95%라는 통계적 표현인데, 이 범위 안에 '위험 차이가 없다'는 뜻의 1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팀은 이 차이를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로 판단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줄어드는데 혈관성 치매는 왜 아닐까
치매는 한 가지 병이 아니라 여러 원인으로 생기는 여러 질환을 묶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이 뇌 안에 비정상 단백질이 쌓여 신경세포가 서서히 기능을 잃어가며 생기는 '알츠하이머병'이고, 그다음으로 흔한 것이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면서 그 부위의 뇌 기능이 떨어져 생기는 '혈관성 치매'입니다.
이번 연구에서는 이 둘을 나누어 살펴봤는데, 결과가 조금 달랐습니다.
- 알츠하이머병 위험은 RASI 그룹에서 유의하게 낮았습니다(위험비 0.59, 95% 신뢰구간 0.43~0.81).
- 반면 혈관성 치매는 RASI 그룹에서 낮은 경향(위험비 0.74)은 보였지만, 신뢰구간이 0.50~1.11로 1을 포함하고 있어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결과는 앞서 설명드린 기전, 즉 RASI가 단순히 혈압만 낮추는 게 아니라 뇌 안의 레닌-안지오텐신계에 직접 작용해 알츠하이머병의 특징적인 변화(단백질 축적, 염증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설과 맞아떨어지는 흐름입니다.
실제로 다른 연구팀이 여러 부검 연구를 모아 분석한 자료에서도, 고혈압이 있는 사람의 뇌에서 알츠하이머병 특유의 병리 변화(단백질 침착 등)가 더 많이 관찰되는 경향이 보고되었고, 혈압약을 복용한 경우 이런 변화가 줄어들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서로 다른 연구 방법으로도 비슷한 방향의 결과가 나온다는 점은, 이번 연구 결과의 신뢰도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됩니다.
한편 RASI 안에서도 ACE 억제제와 ARB로 나누어 비교했을 때는 두 약 사이에 치매 위험의 유의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즉 'RASI 계열이냐 아니냐'가 중요했을 뿐, RASI 안에서 세부 약물 종류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떤 혈압약을 먹어야 할까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이번 연구는 고혈압이 있는 성인 16만 명 이상의 실제 진료 데이터를 바탕으로, RASI 계열 혈압약을 새로 시작한 사람이 CCB 계열을 시작한 사람보다 전체 치매 위험이 약 32%, 알츠하이머병 위험이 약 41% 더 낮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혈압 조절 효과와는 별개로, RASI가 뇌 건강에 추가적인 보호 효과를 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결과입니다.
다만 이 연구는 이미 처방된 약을 비교 관찰한 것이지, RASI를 먹으면 CCB보다 무조건 치매를 예방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연구팀 스스로도 논문에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평균 추적 기간이 1년 5개월로, 치매처럼 서서히 진행되는 질환을 평가하기에는 비교적 짧은 편이라는 점도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CCB를 드시는 분들이 당장 약을 바꿔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혈압약은 개인의 혈압 수치, 동반 질환(당뇨, 신장 기능, 심장 상태 등), 다른 약물과의 상호작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담당 의사가 처방하는 것이며, 임의로 약을 중단하거나 바꾸는 것은 오히려 혈압 조절 실패로 이어져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연구 결과가 궁금하시다면, 다음 진료 때 "제가 먹는 약이 어떤 계열인지, 치매 예방 측면에서도 고려해볼 수 있을지" 담당 의사와 상의해보시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결국 이 글의 처음 질문, "혈압약 종류에 따라 치매 위험이 다를까"에 대한 답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전문의와 함께 나에게 맞는 약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 본 글은 PubMed(PMID: 42804072) 논문을 근거로 작성되었으며, 의학적 진단을 대체하지 않습니다.